주호는 피시방에서 단짝 친구 석구에게 이천 원을 빌리고는 갚을 길이 없어 막막해하는 중이다. 필요할 때마다 돈을 타 쓰는 처지라 여윳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그런데 마침 엄마가 외출하면서 피자를 시켜 먹으라고 만오천 원을 주는 게 아닌가. 주호는 얼씨구나 다른 집보다 이천 원이 싼 석구네 가게에서 피자를 시켜 먹고 거스름돈을 챙기기로 한다. 거스름돈 이천 원을 석구에게 주고 나면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쭉 펴질 것 같다.
그런데 이 꼼수가 악몽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곰돌이 푸처럼 생겨서 말까지 더듬는 배달원 형이 와서 거스름돈 칠천 원을 주고 간 게 사달이었다. 주호가 만오천 원이 아니라 이만 원을 낸 줄 안 것이다. 주호도 처음엔 더 받은 오천 원을 돌려줄 생각으로 얼른 쫓아 나간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보니 마음이 달라진다. 그 형이 실수한 건데, 고작 오천 원인데 싶은 거다. 1층에 멈춰 서서 올라올 줄 모르는 엘리베이터도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 준다.
거스름돈을 더 받아 챙긴 꺼림칙함도 잠시, 주호는 빚을 갚은 후련함에 날아갈 것만 같다.
늦은 저녁, 푸 형이 찾아와 “저, 저기 아, 아까 호, 혹시 거, 거스름돈 더 바, 받지 아, 않았어요?”라고 묻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고 생각한 주호는 아니라고 딱 잡아뗀다.
하지만 푸 형은 생긴 것과 달리 끈질기다. 다음날 등굣길에도, 하굣길에도 주호를 쫓아와 진실을 말해 달라고 조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호는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뗄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그 오천 원 때문에 가게 돈에 손을 댄다는 누명을 쓰고 쫓겨났다는 소리를 들은 뒤부터 자꾸만 푸 형이 눈에 밟힌다. 할머니 병원비를 벌어야 한다는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주호는 결국 제 잘못을 숨긴 채 푸 형을 도울 방법을 찾아 동분서주하기 시작하는데, 주호의 계획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스스로의 마음을 조이는 것이 죄!
주호는 더도 덜도 아닌 딱 요즘 아이다. 제 딱한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하려 드는 푸 형의 말을 “됐거든요.” 하고 두부 자르듯 할 때는 읽는 사람의 마음이 다 서늘해진다. 두부처럼 물러 터진 제 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더 못되게 구는 줄 뻔히 알겠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주호가 둘러 입은 마음의 갑옷도 푸 형의 어수룩함 앞에선 무용지물일 뿐이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주호의 협박(?)에도 금세 풀이 죽고, 작은 관심에도 크게 고마워하고, 선의를 액면 그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아이보다 더 아이 같은 푸 형과 마주하면서 주호의 양심은 물먹은 솜처럼 점점 무거워져 가슴을 짓누른다.
임근희 작가는 딱 주호 또래 아이를 기르는 엄마답게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한 아이의 내적 갈등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 낸다. 주호 안에서 어른들에게 야단맞기 싫은 마음과 푸 형을 돕고 싶은 마음이 오르락내리락 시소를 타는 과정이 마치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실감 나게 와 닿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위태로운 균형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 속이 다 후련해진다.
우리는 끊임없는 선택 속에서 살아간다. 그 선택의 기준이 옳고 그름이 될 때도 있고, 맞고 틀림이 될 때도 있으며, 이익과 불이익이 될 때도 있다. 주호처럼 내 선택이 남에게 피해를 줄 줄 뻔히 알면서도 그릇된 선택을 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의도와는 달리 내 선택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왕왕 있고, 그 피해가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영영 모른 채 지나갈 수도 있다. 우리가 그 모든 선택의 결과를 통제할 수는 없다. 그 와중에 우리가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주호가 보여 주었듯 어떤 행위를 했을 때 내 마음이 조여든다면 그게 바로 ‘죄’다. 죄책감이 얼마나 불쾌하고 불편한 것인지를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양심을 벼리는 일이 아닐까 싶다. 임근희 작가가 정성껏 빚고 주성희 작가가 곱게 포장해 배달하는 양심이 아이들 마음에 제대로 가닿기를 바라 본다.